
Prologue - 시(始)
조선 중엽,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남해안의 한적한 어촌, 장정들은 모두 투망을 하러 나가고 아낙들은 집안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가실이도 빨래를 다 널고는 잠시 마루에 앉았다.
‘어머님, 약값을 좀 마련해야 할 텐데….’
가실이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가장 노련한 어부였다. 다른 어부들이 재미를 보지 못하고 돌아올 때도 정해진 양의 수확을 거르지 않던 아버지 덕에 가실의 가족은 자족할만한 삶을 영위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가실의 아버지는 15살이 된 가실의 남동생에게 처음으로 투망질을 가르치겠다고 바다로 나갔다. 부자가 바다로 나간 지 한 시진쯤 지나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갑자기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가실과 가실의 어머니는 그저 노련한 아버지가 풍랑을 헤치고 돌아오길 빌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러나 풍랑이 그치고 돌아온 것은 마을 사람들이 끌어온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주검 두 구 뿐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갑자기 잃게 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가실의 어머니는 몸져눕고 말았다. 가실은 슬퍼할 새도 없이 어머니의 병간호를 해야만 했다.
가실은 어느새 두 눈에 고인 눈물을 닦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잔잔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바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데려간 무서운 바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를 모시고 바다를 등진 조용한 곳에서 살고 싶은 것이 가실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던 가실에게 마을을 향해 오고 있는 여러 척의 배가 보였다.
‘벌써들 돌아오시나?’
그러나 배에서 내린 것은 마을 남자들이 아닌 한 무리의 왜구 떼였다. 배에서 내린 왜구 떼는 닥치는 대로 노략하고 마을에 불을 질렀다. 평화롭던 마을은 일순간에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왜구들은 아낙들을 범하거나 배로 끌어갔고 어린 아이나 노인들을 참혹하게 베었다. 가실의 집에도 들이닥친 왜구 한 명이 탐욕에 가득 찬 눈으로 가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가실은 본능적으로 주위의 물건들을 마구 잡아 던지며 저항했다. 그러나 왜구가 뺨을 갈기는 서슬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쓰러진 가실을 덮치려는 왜구 앞에 가실의 어머니가 몸을 던져 막아섰다. 왜구는 칼을 들어 가실의 어머니를 베고는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차츰 가실에게 다가서던 왜구가 잠시 흠칫하더니 단말마의 비명을 올렸다. 무엇인가에 의해 목을 관통당한 왜구는 힘없이 쓰러졌다.
“두목, 두목! 큰일 났습니다!”
배에 남아 있던 두목 격의 사내가 급하게 달려드는 부하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자가 우리 패의 반 이상을 베었습니다. 정말 귀신같은 녀석입니다!”
왜구의 두목은 곁에 있던 거대한 일본도를 들고 말했다.
“앞장서라!”
마을에 당도한 두목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자기 부하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모든 시체들은 무엇인가에 의해 급소가 관통당해 있었다. 그 중 하나의 시체에서 목에 박혀있던 것을 두목이 뽑아 들었다.
‘매화!’
순간 긴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는 부하 한 명이 시체가 되어 두목의 눈앞에 떨어졌다. 그에 이어 한 사내가 두목과 그의 부하 앞에 섰다.
“저 놈입니다! 흑귀신입니다!”
두목 앞에 선 사내는 검은 복면에 검은 복색을 갖추고 있었다. 부하의 말대로 가히 흑귀신이라 이를 만 했다. 흑귀신은 서서히 등에 매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두목도 들고 있던 일본도를 추켜들었다.
“하아-앗!”
두목의 도(刀)가 반월을 그리며 흑귀신을 파고들었다. 날렵하게 몸을 피한 흑귀신에게 두목의 곁에 있었던 부하가 연이어 달려들었다. 흑귀신은 왜구의 칼을 피해 하늘로 치솟으며 무엇인가를 날렸다. 매화가지에 목을 꿰뚫린 왜구는 길게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흑귀신은 땅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한 번 치솟아 두목의 머리를 노렸다. 두목은 칼을 들어 서슬이 퍼렇게 날아드는 흑귀신의 칼을 막았다. 쨍하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났다. 흑귀신은 공중에서 빙글 돌아 두목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땅에 착지했다.
‘만만히 볼 자는 아니군.’
두목은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빈틈을 노렸다. 그러나 두 사내 모두 틈을 두지 않은 채 날카로운 눈빛만이 오갔다. 두세 번 칼이 오갔는데도 서로에게 상대를 벨 기회가 오지 않자 두목은 칼로 모래땅을 힘차게 그었다. 매섭게 튄 모래가 미처 예상을 못한 흑귀신의 시야를 가렸다. 흑귀신이 주춤한 사이 두목의 도가 번쩍 했다. 어깨를 움켜쥐며 흑귀신은 저만치
피했다. 한번의 공격이 성공하자 자신이 생긴 두목은 긴 기합과 함께 흑귀신에게 달려들었다. 무척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흑귀신은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에 죽은 왜구가 떨어뜨린 도가 보였다. 날렵하게 몸을 날려 땅에 놓여진 도를 발로 찼다. 도가 날카롭게 두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흠칫하며 몸을 피했지만 다음에 날아드는 흑귀신의 검을 피할 수 없었다.
“어-억!”
거대한 고목이 쓰러지듯 두목은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흑귀신은 아픈 어깨를 추스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처 치료를 위해 마을의 한 집에 들어서니 한 여인이 신음을 하고 있었다. 일으켜서 물을 마시게 하니 정신이 드는지 흑귀신을 천천히 바라봤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누구…, 앗! 어머니!”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가실의 눈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가실은 어머니의 주검을 부둥켜안고 오열을 했다. 한참을 통곡하고 난 가실은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며 마루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흑귀신은 가실의 어머니를 모셔다 마을 근처에 묻어 주었다. 가실의 어머니를 묻고 오자 가실이 마루에 앉아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그를 맞아 주었다.
“이제 어쩔거요…?”
“이제는 어머니까지 가시고, 저도 더 이상 세상에 연을 두고 싶지 않습니다….”
“약한 말씀 마시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이오!”
“흑...흑흑...”
오열하는 가실을 보자 흑귀신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흑귀신의 아버지는 강직한 선비였다. 벼슬아치들의 부정에 염증을 느낀 선비는 가족을 이끌고 깊은 산골에 정착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어려워만 가는 국운을 우려하여 계속해서 충언이 담긴 상소문을 올렸다. 충언을 귀에 거슬려 하던 썩은 벼슬아치들은 자객을 보냈다. 아버지가 자객에게 살해되고 화근을 없애겠다며 어린 아들에게 자객이 칼을 들어 내리치는 순간 어머니가 막아서서 대신 칼을 맞았다. 죽을 위기에서 흑귀신을 구한 것은 한 스님이었다. 그 스님은 밤이 늦어 묵을 곳을 찾다가 죽임을 당하려는 아이를 구하게 된 것이었다. 아이를 데려다가 자신의 암자에서 키우며 신묘한 하늘의 이치와 무술을 가르쳤다. 아이가 장성하여 18세에 이르자 스님은 아이를 불러 전언을 했다.
“내가 너를 만난 것도 어쩌면 하늘의 이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헤어지는 것도 하늘의 이치인 것을 알아두거라. 내가 너에게 무술을 가르친 것은 너의 업보가 평생을 불의한 무리와 싸워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몸조심하고 바른 길만 가도록 해라….”
스님은 전언을 하고는 깊은 산 속으로 유유히 떠나갔다. 그 후로 흑귀신이 된 아이는 부정한 관리를 응징하고,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불의한 무리에 맞서왔다. 이런 흑귀신을 민초들은 ‘일지매’라 일컬었다….
“나를 따르겠소?”
가실은 눈을 들어 일지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따뜻했다. 가실은 말없이 일지매의 품에 안겨 다시금 오열을 터뜨렸다. 일지매는 그저 가실을 안고 있었다. 마치 가실의 그 모든 슬픔을 품에 안은 듯이….
<계속>
* 본 작품의 저작권은 방아쇠효과(triggaeffect)/Black Scholar 에게 있습니다.




